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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

지랄같은 역사 0 1980
조선 왕을 말하다 - 인조



① 西人들의 왕



왕조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들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의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민심이 안정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신경 쓰고 장성한 능양군(인조)을 주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능양군의 부친이 정원군(定遠君)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의 모친 공빈(恭嬪) 김씨의 연적(戀敵)이던 인빈(仁嬪) 김씨 소생의 정원군은 백성들의 공적(公敵)이었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체포해 일본군에게 넘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악명 높은 세 명의 왕자였다. 임해군과 정원군은 심지어 사노(私奴)를 잠상(潛商)으로 삼아 일본군과 내통하며 이익을 취했다. 선조 30년(1597) 1월 사노 희남(希男)이 간첩 혐의로 포도청에 체포되자 정원군은 임해군과 함께 포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 석방을 요구했다. 이를 안 사헌부에서 임해군·정원군의 파직을 요청했으나 선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해 6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길을 다투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하인을 집단 폭행해 유혈이 낭자한 채 실려가는 사건도 있었다. 9월에는 정원군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하인들이 쇄마(刷馬:지방 관아의 말) 200필에 실을 정도의 금품을 약탈했다.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사헌부에서 추고(推考:수사) 요청을 했으나 선조는 “주인이라고 해서 하인들이 한 일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선조실록』 35년(1602) 6월조의 사관은 “여러 왕자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노비를 빼앗았다”며 “가난한 사족(士族)과 궁한 백성들이 자기의 토지를 잃고도 항의할 수도 없어 중외가 시끄러웠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해 9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선조의 맏형인 하원군(河原君:정원군의 백모)의 부인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사간원에서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으나 선조는 “살펴서 조치하겠다”고 무마했을 뿐이다.

『선조실록』에는 정원군의 패륜 행위에 대한 사실이 수없이 실려 있으나 서인들이 작성한 『광해군일기』는 정원군에 대해 “어려서부터 기표(奇表:우뚝한 외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었다”라고 극찬하고 있으니 지금처럼 당론(黨論)에 눈이 멀면 흑백(黑白)을 불분(不分)함을 알 수 있다. 정원군이 조야에서 버림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광해군은 그 아들 능양군이 쿠데타의 주역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綾昌君)이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돼 처형당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능양군의 친동기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인 신익성(申翊聖)이 쓴 『연평일기(延平日記)』에는 인조반정이라 불린 쿠데타의 진상이 자세하다. 쿠데타 주역 이귀(李貴)는 자신의 부인상에 문상 온 신경진(申景진)을 모의에 끌어들였다. 광해군이 재위 14년(1622) 8월 이귀를 황해도 평산(平山) 부사로 임명하자 부임 도중 장단(長湍) 방어사 이서(李曙)를 끌어들였다. 이때 평산과 개경 사이에 호랑이가 출몰해 인명을 살상했는데 이귀는 큰 호랑이를 잡아 바치고 기뻐하는 광해군에게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경계를 넘어가면 쫓을 수 없는데 경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속셈을 모른 광해군은 허락해주었다.

그해 12월 이귀는 장단방어사와 함께 발병(發兵)하려 했으나 유천기(柳天機)가 고발해 사전에 발각되었다. 『연평일기』는 “다행히 유희분·박승종 등의 주선으로 파직에 그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했던 소북(小北) 유희분·박승종으로선 이 사건의 여파가 인목대비에게 미칠 것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북인들도 인목대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역모를 눈감아 준 형국이니 광해군의 몰락은 인목대비 폐모로부터 나왔다.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하담파적록(何潭破寂錄)』에는 반정 일등공신이 되는 김자점(金自點)이 김 상궁에게 뇌물을 써서 막았다고 달리 전한다.

광해군(1623) 15년 3월 12일 반정 당일, 쿠데타 세력은 밤 2경(9~11시)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했는데 그 전에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이 고변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군사는 절반도 모이지 않았고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류)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평일기』는 김류가 “고변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잡혀갈 때만 기다리면서 감히 나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이 대신 쿠데타군을 지휘했는데 김류는 집까지 찾아온 심기원(沈器遠)·원두표(元斗杓)의 재촉을 받고 뒤늦게 나타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렇게 쿠데타군 진영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가 광해군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이마저 놓쳐버렸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에 따르면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인 경기감사 박자흥(朴自興)이 쿠데타 소식을 듣고 양주(楊州)로 달려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사위인 수원 방어사(防禦使) 조유도(趙有道) 등에게 군사 진압을 명했다. 그러나 결국 진압에 실패하고 박승종·박자흥 부자는 자결하고 만다.

인조반정은 성공했으나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폐모는 양반 사대부에게는 강상(綱常)의 문제였지만 백성에게는 늘 있던 궁궐 권력 다툼의 하나에 불과했다. 반정 일등공신 이서(李曙)는 반정 직후 백성들의 반발을 기술하면서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었다’라고 적어 내심 당황했음을 말해준다. 이때 서인들이 난국타개책으로 제시한 것이 남인 이원익(李元翼)의 영의정 제수였다. 이원익은 폐모에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 중이었는데 『인조실록』 1년(1623) 3월 16일자는 “인조가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다.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인들이 남인을 영상으로 영입한 것은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았음을 뜻한다.

광해군은 서인들에게는 몰라도 백성에게는 나쁜 임금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은 ‘이원익의 연보(完平年譜)’를 인용해 쿠데타 직후 인목대비와 반정공신들이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이원익이 “그를 섬긴 노신(老臣)으로서 차마 들을 말이 아니니 조정을 떠나겠다”고 반발해 죽이지 못했다고 전한다.

쿠데타 당일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대궐 후원 어수당(魚水堂)에 이틀 동안 숨어있었다. 조선 후기 성해응(成海應)의 ‘초사담헌(草사談獻)’에는 유씨가 궁인(宮人) 한보향(韓保香)에게 “중전이 여기 계시다”라고 소리치게 한 뒤 체포하러 온 대장(大將)에게 “오늘의 거사는 종사를 위한 것인가 부귀를 위한 것인가”라고 따졌다고 전해준다. 유씨는 남편이 쫓겨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광해군과 왕비 유씨는 강화에 위리안치되고 세자 이지(李지)와 세자빈 박씨는 강화 교동(喬桐)에 안치되었다. 세자는 그해 5월 땅굴 70여 척을 파서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판 ‘쇼생크 탈출’을 연출했으나 나졸 최득룡(崔得龍)에게 붙잡혔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황해순영 서간(黃海巡營書簡)’ 등은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인조실록』은 “최근 도성 안에서 유언비어가 날로 생겨난다”라고 적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민심이 상당함을 말해주고 있다. 세자가 체포된 지 사흘째 세자빈 박씨는 목을 매 자결했고, 인조는 한 달 후 세자를 사형시켰다. 세자는 ‘자결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부모의 안부를 알고 나서 죽고자 했던 것’이라면서 의관을 정제한 다음 손톱과 발톱마저 깎으려 했으나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는 “죽은 뒤에 깎아주면 좋겠다”고 말한 후 황천(皇天)·후토(后土)와 광해군이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한 후 목을 매 자결했다.


조경남(趙慶男)의 『속잡록(續雜錄)』에는 세자가 교동에서 “어떻게 이 새장을 벗어나, 녹수청산 마음대로 오고 갈까(綠何脫此樊籠去 綠水靑山任去來”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해준다. 인조반정은 특정 당파가 당론으로 국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상태까지 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왕조 정치의 파탄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한 이들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치로 내걸었다. 대륙의 만주족과 전쟁을 예고하는 정책전환이었다.



② 정치보복과 자체 분열




정치는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폐모론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조정에서 대거 내쫓은 대북에 대해 서인은 대거 살육으로 보복했다. 폐모는 명분일 뿐 본질은 정적 제거여서 폐모에 반대한 소북까지 모조리 죽였다. 정치가 사라진 빈자리는 혼란이 차지하는 법이어서 이괄의 난이 발생하고 그 여파로 청(淸:후금)까지 남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덴리(天理)대학이 소장 중인 오리(梧里) 이원익의 영정. 남인이었으나 서인에 의해 영의정에 발탁된 이원익은 기자헌 등 37명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집권 서인은 대대적인 정치보복에 나섰다. 대북 영수 정인홍을 사형시키고 이이첨과 네 아들 이대엽·이익엽 등도 사형시켰다. 이이첨의 처형 반교문(頒敎文)은 온갖 비난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한구석의 “계씨(季氏)보다 사치스럽고 부유한데도 사람들은 도리어 베 이불을 덮는 검소한 자라고 칭송했고, 이리처럼 백성을 침해하고 탈취했는데도 사람들은 거꾸로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공손한 자라고 일컬었다”는 구절은 다른 일면을 보여 준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이첨이 부모의 삼년상을 치를 때 “3년 동안 묽은 죽만 마시다가 삼년상이 끝난 후에야 염장(鹽醬:소금과 간장)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다. 매일 물을 10여 사발씩 들이켜 온몸이 부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전하고 있다. 쿠데타 측에서 작성한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은 백관이 둘러보는 가운데 정형(正刑:사형)한 16명의 이름을 적고 있는데 명분은 폐모였지만 자의적인 기준이었다.

이이첨부터가 그랬다. 『묵재일기(묵齋日記)』는 폐모론이 일자 반정 주역 이귀(李貴)가 유순익(柳舜翼)을 이이첨에게 보내 중지를 요청했는데, “그 후 이이첨이 폐모론을 현저하게 주장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처형당할 때 이이첨은 이귀에게 “전에 유순익을 통해 대감의 말을 듣고 폐모론을 극력 정지시켰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하신 것이 다 나의 힘”이라면서 “왜 죽이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귀는 “당초에 이 논의가 누구에게서 나왔느냐”고 싸늘하게 답했다.

『계해정사록』은 정형당한 16명 외에 복주(伏誅:사형)당한 64명의 명단도 싣고 있다. 폐모를 빙자한 정적 숙청인데 그중에는 쿠데타 당일 역모를 고변했던 이이반도 들어 있었다. 한 당파가 정권을 잡아 다른 당파의 씨를 말리는 살육정치의 시작이었다.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처럼 쿠데타에 대해 싸늘한 민심 수습 차원에서 등용된 남인은 이런 대살육이 자행될지 몰랐다. 조경(趙絅)의 『용주집(龍洲集)』은 충청감사에 임명된 이덕형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에 대해 “대비를 돕고자 했던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해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변호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안의 영은사(왼쪽 사진). 공주 석송정은 인조가 피난 길에 잠시 쉬던 곳으로 전해진다(오른쪽 사진). 사진가 권태균
김천석(金天錫)의 『명륜록(明倫錄)』에 따르면 인조가 “유희분 등을 죽이지 않으면 의거를 한 보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고 전해져 쿠데타의 목적이 정적 살육이었음을 말해 준다. 폐모는 명분일 뿐 북인의 씨를 말려 재기를 막으려는 정치적 살해였다. 그러니 광범위한 정치보복이 자행되었고 광해군 주변의 여성도 숱하게 죽였다. 광해군이 총애했다는 김 상궁과 그 어미의 재가한 남편 유몽옥(劉夢玉), 광해군의 후궁 숙의(淑儀) 윤영신(尹永新)을 사형시켰고 소원(昭媛) 정씨는 목매어 자살했다. 여옥(女玉)·난향(蘭香)·도란(道蘭)·추영(秋英)·생이(生伊)·난이(蘭伊)·숙진(淑眞) 등의 궁녀도 모두 사형시켰는데 인목대비 김씨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사형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목숨은 겨우 건졌으나 유배지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하거나 삭탈관작(削奪官爵) 등의 형벌을 받은 인물들은 셀 수조차 없다.

광해군을 복위하려는 기도도 있었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유약(柳약) 부자 등이 그들이다. 유몽인은 광해군 13년(1621) 파직된 후 금강산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광해군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거병하려 했다. 조익(趙翼)의 『포저집(浦渚集)』에는 “유몽인은 형신(刑訊:고문)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광해군)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고 적고 있다. 반정공신 이귀는 인조 2년(1624) 11월, “유몽인이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했다”고 말했다. 『사기(史記)』 백이 열전은 은(殷) 주왕(紂王)을 치러 가는 희발(姬發:주 무왕)에게 백이가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이 어찌 인이겠습니까(以臣弑君 可謂仁乎)”라고 간했다고 나온다. 유몽인의 백이설은 인조와 쿠데타 주역들이 역신(逆臣)이란 의미였다.

게다가 피의 살육을 자행한 서인은 자체 분열되어 전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괄(李适)은 쿠데타 당일 이이반의 고변 소식을 듣고 집결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의병대장 김류(金류)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연평일기』는 이괄이 쿠데타 당일 뒤늦게 나타난 김류의 목을 베려 했다고까지 전하는데 막상 모화관(慕華館)에서 열린 쿠데타 성공 기념 잔치에서 김류의 자리는 이괄보다 상석이었다. 이괄은 “김류는 무슨 공이 있어서 우리의 상석에 앉는가”라고 소리쳤다.

이괄은 논공행상에서도 소외되어 김류·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 등은 정사(靖社) 1등공신에 올랐으나 이괄은 2등공신으로 떨어졌고 쿠데타에 가담했던 아들과 손자도 훈적(勳籍)에서 누락되었다. 당초 이귀가 이괄의 자리로 천거했던 병조판서도 김류가 차지했다. 쿠데타 두 달 후인 인조 1년(1623) 5월에는 후금(後金)의 동태가 심상찮다는 이유로 장만(張晩)을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아 관서지방으로 보내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寧邊)으로 내보내 장만의 지휘를 받게 했다. 영변으로 떠나던 날 1등공신 신경진이 “영공(令公)이 돌아오면 내가 가겠다”고 위로했으나 이괄이 성을 내며 “나를 쫓아내는 길이면서 속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고 『연려실기술』은 적고 있다.

조정은 지방으로 쫓겨간 이괄을 다시 자극했다. 인조 때 김시양(金時讓)이 지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은 “원훈(元勳:1등공신) 등이 특출 난 공을 세웠으나, 인심이 불복할까 우려해 사방에 감시하고 밀고하는 문을 크게 열어놓은 것이 ‘이괄 난’의 발단”이란 시각을 보인다.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아 감시와 밀고를 장려하자 문회(文晦)·이우(李祐) 등이 기자헌(奇自獻)과 이괄·이전(李전) 부자, 한명련(韓明璉) 등이 모반(謀反)한다고 고변했다. 기자헌은 광해군 때 북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이었으나 폐모에 극력 반대해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조정에서 기자헌을 체포하고 이괄과 함께 있는 아들 이전도 체포하겠다며 금부도사를 이괄의 진영에 보내자 이괄은 폭발했다.

이괄은 쿠데타 9개월 만인 인조 2년(1624) 정월 17일 선조의 10남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提)를 임금으로 추대한 뒤 군사를 일으켰다. 능양군(인조)이 아니라도 선조의 핏줄은 많았다. 이괄의 군사가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인조는 급기야 서울을 버리고 도주했는데 그 직전 옥에 갇힌 기자헌에게 사약을 내리고 이시언(李時言)·유공량(柳公亮) 등 나머지 36명은 목을 베어 죽였다. 인조 2년(1624) 1월 25일의 일인데, 이귀는 국문하여 사실을 가린 후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김류가 “변란이 서울에서 일어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면서 모두 죽이자고 주창해 인조가 따랐던 것이다.

폐모를 반대하다 귀양 간 기자헌마저 죽였으니 폐모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다음 날 이 소식을 듣고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참여치 못했으니, 이제 나는 늙어 폐물이 되었구나”라고 혀를 찼다고 전한다. 서인이 구색 맞추기용으로 끌어들인 남인의 현실이었다. 서울까지 점령하고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했던 이괄은 장만이 이끄는 관군과 길마재[鞍峴]에서 맞붙었다가 패배했다. 이괄은 2월 15일 이천에서 부하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살아남은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후금으로 도주하는데, 『청사고(淸史稿)』 조선 열전은 그가 “향도(嚮導: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해 병단(兵端)으로 이끌었다”고 적고 있다. 쿠데타 후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해 청의 분노를 산 것으로도 부족해 쿠데타 세력의 내분으로 청의 길잡이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래저래 인조반정은 청의 침략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③ 外患 부른 쿠데타




인조와 서인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몰라서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친명 사대는 정권 획득과 유지의 명분이었다. 군사는 없지만 전쟁불사론이 횡행했고 현실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제 정세는 국내 정세에 파묻혀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되었다. 이 양자 사이 모순의 충돌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
남한산성(55Χ42㎝):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이불조차 없는 한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인조반정은 혼돈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광해군 폐출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다. 인조 1년(1623) 8월에는 김덕원(金德元)·주대윤(朱大允) 등이, 10월에는 황현(黃晛)·이유림(李有林) 등이 사형당했다. 군사를 동원한 기찰이 대폭 강화된 가운데 인조 2년(1624)에는 광해군 때 좌의정이었던 박홍구(朴弘耉)가 다시 사형당했다. 저항이 잇따르자 의정부는 ‘통유문(通諭文)’을 반포했는데, “전후 여러 역적들의 공초나 흉한 격문에서 말한 바는 다 동일하게 ‘폐주를 마땅히 봉환(奉還: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의 반정은 정(正)이 아니다. 자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어찌 정인가”라고 반발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부른 것은 내란뿐이 아니었다.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에게 불충했다는 것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건 인조정권은 욱일동승(旭日東升)하는 후금(後金:청)에 적대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누루하치는 인조 4년(1626) 2월 13만 대군으로 산해관의 길목인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다가 홍이대포(紅夷大砲)의 반격을 받아 그해 7월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명사(明史)』나 『청사고(淸史稿)』 같은 중국 사료에는 이런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조선의 이성령(李星齡)이 쓴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에만 기재되어 있다. 9월 누루하치의 여덟째 아들이자 대(對)조선 강경파인 황태극(皇太極:태종)이 즉위한다. 황태극은 후금의 실세였던 4패륵(貝勒:버일러, 皇子의 뜻) 중 넷째 서열에 불과했다.

조선의 김종일(金宗一:1597~1675)은 『노암문집(魯庵文集)』에서 “노한(老汗:누루하치)이 죽으면서 ‘나의 뜻을 이룰 능력이 있다’며 황태극을 후사로 지명했다”고 전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청사고』가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청사고』 태종 본기는 “여러 패륵이 의논해 (황태극에게) 자리를 이을 것을 청하자 재삼(再三) 사양하다가 마침내 허락했다”고 전한다. 이 무렵 조선은 평안도 철산 가도(가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해 후금을 자극했다. 『인조실록』 2년(1624) 6월조는 “모문룡이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수색해 빼앗아 연로(沿路)가 텅 비고 백성이 모두 호곡(號哭)했다”고 전하지만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 때의 원군(援軍)처럼 생각했다.



드디어 인조 5년(1627) 1월 청 태종은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다. 향도(嚮導:길잡이)는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윤(韓潤)이었다. 인조 정권은 아무런 국방 대책이 없었고 이순신의 조카인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의주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후금군의 기세를 묻는 인조의 질문에 이원익이 “철기(鐵騎)로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 동안에 8∼9식(息:1식은 30리)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고 답변했으니 서울까지 닷새면 도달할 속도였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身彌島)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가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에게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라고 묻자 “모른다”고 답변했다. 인조는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인조 정권의 현실이었다. 대간(臺諫)에서 ‘전하께서 국문(國門)에 나가셔서 직접 정벌에 나서겠다고 군민(軍民)을 효유하시고, 맨 먼저 도성을 떠나자고 제창한 자를 빨리 목 베어 군문에 효시하소서’라고 요청하자 인조는 “태반은 현실성이 없는 의논”이라고 반대했다.
인조는 다음 날 분조(分朝)를 편성해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다. 임란과 달리 의병이나 근왕병도 달려오지 않자 그해 3월 3일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해 제천(祭天)하고 정묘약조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고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것이 핵심 조항이었다. 정묘호란은 쿠데타 정권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어서 다시 봉기가 잇따랐다. 인조 5년 9월에는 전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이인거(李仁居)가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의 기치로 군사를 일으켜 횡성 관아를 점령했다. 제천에 유배 중인 유희분(광해군의 처남)의 조카 유효립(柳孝立)은 인조 6년(1628) 1월 4일 궁내 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하루 전인 1월 3일 동지였던 전 세마(洗馬) 허유(許유)의 친족 허적의 고변으로 무산되었다. 허적은 악명 높던 인조의 부친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하자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가 공론(公論)에 용납되지 못해 시골로 가 있다가 횡재한 셈이었다.

쿠데타에 대한 반발이 거셀수록 쿠데타 정권은 후금 적대정책을 강화해야 하는 모순에 빠졌다. 청 태종은 1635년(인조 13년) 찰합이(察哈爾:차하르)를 정벌해 전체 몽골족을 병합하고 이듬해 4월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했다. 청 태종이 황제(皇帝)를 자칭하면서 조선을 ‘너의 나라(爾國)’라고 비하하는 국서를 보내자 격분한 조야는 전쟁불사론이 횡행했다. 그러나 이념과 입은 있었지만 군사는 없었다.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났지만 국방력은 전혀 강화되지 않았다. 판윤 최명길(崔鳴吉)은 인조 14년(1636) 9월 척화론(斥和論)을 비판하면서 “강물이 얼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인조는 묵묵부답이었고 척화파는 최명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목청을 드높였다. 척화에 동조하자니 군사가 없고 강화를 따르자니 쿠데타 명분을 부인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었다.

인조는 재위 14년(1636) 11월 특지로 교리 조빈(趙贇)을 평안도 도사로 임명했는데 『인조실록』은 “척화론을 극력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신을 평안도에 두면 안 된다는 건의가 잇따라 충청도 도사로 이전시켰다. 척화는 주장하되 전쟁터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 입만 살아있던 성리학자들의 본질이었다.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 태종은 12만 병력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휘하의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대(馬夫大)의 기병부대에게 의주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바로 서울로 남하시켰다. 14일에 개성 유수가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고 보고하자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길이 끊긴 상황이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인조실록』은 “성 안 백성 중 부자·형제·부부가 서로를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게다가 남한산성은 겨울 농성 장소가 아니었다. 1만3000여 병력과 1만4000여 석의 양곡이 있었으나 혹한은 청나라 군사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추위에 강한 청군이 눈 덮인 산성을 포위했으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얼어 죽는 군사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인조 15년(1637) 1월 26일 강화도가 나흘 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그달 30일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백성들에게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성리학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이 부른 외환(外患)에 불과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을 제주로 옮겼는데, 신경진(申景진)·구굉(具宏)·신경인(申景<798B>) 등 반정공신들이 경기수사(京畿水使) 신경진(申景珍)에게 “잘 처리하라(善處)”고 연명서를 보냈다. ‘몰래 죽이라(潛害)’는 뜻이었으나 신경진이 따르지 않았다고 『연려실기술』은 전한다. 병자호란은 세상이 이미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실례였다. 인질로 간 소현세자는 이를 깨달았으나 혼자만의 깨달음이었다.



④ 날개 꺾인 소현세자




모든 역사에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 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향했다. 능한(凌漢)산성을 함락당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세자를 전주로 보낸 것이다. 정묘약조 체결 후 상경한 세자는 그해 11월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했다. 그해 12월 4일 인조는 숭정전(崇政殿)에 나가 세자빈 책봉례를 행했다. 긴 악연(惡緣)의 시작이었다.

세자와 강빈(姜嬪)은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년(1636:병자년) 3월 원손(元孫)을 낳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인조는 12월 17일 홍서봉을 청군 진영으로 보내 강화 협상을 지시하면서 “먼저 전날의 실수를 사과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전날 능봉군(綾峯君) 이칭(李稱)을 인조의 동생이라고 속여 강화 대표로 보냈으나 사실이 탄로나 함께 갔던 무신 박난영(朴蘭英)이 청군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정묘호란 때도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고 속여 후금군 진영에 보낸 적이 있었다. 청장(淸將)이 “너의 나라(爾國)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번에는 진짜 왕제인가?”라고 추궁한 결과 가짜임이 드러난 것이다.

청군은 강화 대표로 세자를 요구했는데, 인조는 전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보내면서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동궁(東宮:세자)을 청한다 한들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인조실록』은 “이때 세자가 상(上:성상)의 곁에 있다가 오열을 참지 못해 문 밖으로 나갔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강화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조선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나 세자 자신이 비국(備局:비변사)에 봉서(封書)를 내려 결자해지(結者解之)했다. 세자는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인조실록』 15년 1월 22일)라면서 인질을 자청했다. 청이 육경(六卿:판서)의 아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자 강화 대표의 한 명이던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병을 핑계로 사직해 인질을 피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결단이었다.

인조 15년(1637) 4월 세자는 개국 이래 처음 인질로 끌려갔다. 세자 일행은 조선관(朝鮮館)이라고도 불린 심양관(瀋陽館)에서 거주했는데, 정조 14년(1790) 부사로 다녀온 서호수(徐浩修)의『연행기(燕行紀)』는 심양성 동쪽에 조선관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명·청(明淸) 교체기라는 대륙 정세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소현세자는 한편으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종일관 조선의 국익을 지켜냈다.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해야 했으며, 반청 행위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보호해야 했다.

심양 남탑(南塔)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도 있었다. 소현세자 측에서 조정에 보고한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5년 5월조는 ‘조선 노예들의 속환가(贖還價)가 수백,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전한다.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던 심양관의 유지 비용도 큰 문제였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근처 4곳에 모두 600일갈이(하루갈이는 장정이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의 농토를 제공했다.

조선 측은 ‘세자를 영구히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며 거부했으나 세자는 이를 받아들여 농사를 지었다. 『심양장계』는 인조 20년에 3319석을 거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는 이 곡식으로 포로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을 속환시켜 농사를 지었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곡식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심양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인조 22년(1644) 3월 역졸(驛卒) 출신의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목매어 자결했다. 총병(摠兵)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의 병력이 명(明)의 마지막 무력이었다. 『청사고(淸史稿)』 세조 본기는 “(북경 함락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해 적(賊:이자성)을 토벌하자고 청했다”고 전한다. 청의 섭정왕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명목은 연합군이었으나 오삼계가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친 데서 알 수 있듯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다이곤은 북경으로 남하하면서 명의 멸망을 목도시킬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인조 22년(1644) 4월 산해관을 떠난 청군은 질풍노도의 속도로 한 달 만에 북경에 입성했고 이자성은 도주했다. 세자는 일단 심양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9월 다시 북경에 와서 약 70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 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사상의 큰 변화를 겪는다. 세자는 성리학 이외에 서학(西學)이란 사상과 서양이란 문명세계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세자는 성리학만이 조선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북경 남(南)천주당의 신부였던 황비묵(黃斐묵)은 그의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세자와 아담 샬의 교류를 전하면서 “세자가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 갔고 샬 신부도 자주 세자의 관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두 사람은 깊이 뜻을 같이했다”고 전한다.

그해 9월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나라는 더 이상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조 23년(1645) 2월 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길에 올랐다. 세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해 전인 인조 22년(1644) 정월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인조 22년 3월 세자가 청으로 돌아간 직후 반정 1등 공신 심기원(沈器遠)은 군사를 일으켜 인조를 축출하려 했다. 심기원은 ‘인조가 반정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추존하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세자에게 전위(傳位)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심기원은 호란 이후 인조가 청에 유화적이어서 불만을 품은 것인데, 실제로는 ‘세자를 받들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 했다. 회은군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잡힌 15세의 딸이 청 황실의 시녀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광해군에게 향했던 칼날이 자칫 인조에게 향할 뻔한 일이었다. 심기원 등은 사형당했으나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심기원이 세자를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세자의 귀국을 환영할 리 없었다. 인조는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조차 막을 정도로 냉대했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발병 사흘 만에 급서했다. 34세의 건장한 세자가 급서하자 독살설이 잇따랐다. 『인조실록』의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외인(外人)들은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을 비호했고,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종법과 달리 아들이 아니라 동생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인조가 몰랐다고 볼 수는 없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여 새로운 사상에 기반한 현실적 개혁정책을 펼쳤다면 인조반정으로 야기된 모든 내란과 외환은 새 시대의 출산을 위한 산고쯤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세자를 죽인 칼날은 부인 강빈과 그 아들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⑤ 세자 일가의 비극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亂賊)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남은 세자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심양을 관통하는 혼하(渾河:옛 야리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 청나라 고관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그런 행위는 인조의 분노를 샀다. 큰 사진은 현재 이용하는 혼하의 다리. 작은 사진은 다리 위에서 상인이 생선을 팔고 있는 모습. 사진가 권태균
소현세자의 급서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학질 환자에게 사흘 동안 침만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세자 사망 다음날인 인조 23년(1645) 4월 27일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는 “세자께서 한전(寒戰:오한)이 난 이후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며 이형익 등의 국문을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인조는 이형익 보호를 위해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의 봉입을 금지시켰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이 대사헌으로서 계속 이형익의 처형을 주청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다. 세자 죽음의 배후가 차차 드러났다. 인조는 관에 재궁(梓宮:임금의 관)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서인에게 쓰는 널 구(柩)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자 대신 묘(墓)자를 썼다. 장남의 상사(喪事) 때는 부모도 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영상 김류(金류), 좌상 홍서봉(洪瑞鳳) 등은 기년복(일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인조는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실시해 12일간으로 정했다가 7일 만에 끝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세자시강원 필선(弼善:벼슬 이름) 안시현(安時賢)은 세자 사부(師傅)가 아무도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시현은 인조 23년 5월 6일 세자의 장남인 원손(元孫) 이석철(李石鐵)을 “세손(世孫)으로 정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종법(宗法)대로 장손을 인조의 후사로 삼으라는 주청이었다. 인조는 “이런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꾸짖고 쫓아냈다. 이상 조짐이 계속되었다. 인조는 술관(術官:풍수가)들이 영릉(英陵:세종과 부인의 능) 동쪽이 길지(吉地)라고 천거했지만 인조는 ‘길이 멀고 폐단이 크다’며 효릉(孝陵:인종과 부인의 능) 등성이로 결정했다. 이의를 제기한 술관 장진한(張鎭漢)은 국문에 처했다.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장례일이 자오(子午)가 대충(對沖:방위가 서로 마주침)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고 불평했다. 정북(正北:자)과 정남(正南:오)이 맞서는 날 장례를 치르면 원손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짐을 간파한 안시현은 5월 27일 상소를 올려 ‘예관(禮官)이 원손을 세손으로 삼자고 주청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6월 2일 인조는 조정의 주요 대신을 모두 불러 속셈을 털어놓았다. “나는 숙질(宿疾)이 이따금 심해지는데 원손은 저렇게 미약하다. 금일의 형세를 보건대 어린아이가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장남이 사망할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종법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신하도 모두 원손의 사위(嗣位)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청나라에 물든 소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지만 산림(山林) 송준길(宋浚吉)이 ‘억만 겨레 신민의 희망이 원손에게 있다’며 척화파 김상헌에게 원손의 보도(輔導)를 맡기자고 주장한 것처럼 원손은 잘 교육시키면 반정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인조실록』은 신하들이 원손 교체에 반대하자 “임금의 분노가 심했으므로 좌우에서 다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영의정 김류는 “만약 상(上: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의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발 물러섰다. 인조는 당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영중추부사 심열(沈悅)은 “국본(國本:세자)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당일 원손은 교체되고 차자(次子) 봉림대군이 후사로 결정되었다.

원손은 졸지에 차기 임금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인조는 재위 23년(1645) 8월 강빈의 궁녀들을 내옥(內獄)에 가두고 국문시켰다. 저주했다는 혐의였다. 인형 따위에 바늘 등을 꽂아 저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일이었다. 인조의 목적은 저주의 배후가 강빈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인조 23년(1645) 8월과 9월 원손의 보모(保姆)였던 상궁 최씨와 강빈의 궁녀 계향(戒香)·계환(戒還) 등은 심한 고문 끝에 강빈의 이름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이 저주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죽었으나 인조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24년(1646) 1월 인조는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고 주장하며 정렬(貞烈) 등 강빈의 다섯 궁녀와 어주(御廚:주방) 나인 세 명을 또 국문했다. 『인조실록』이 “임금이 궁중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겨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형세였다(24년 1월 3일)”고 쓴 것처럼 인조의 억지였다.

인조는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가두고 문에 구멍을 뚫어 물과 음식을 주게 했다. 궁녀 난옥(難玉)은 고문사했고 강빈이 신임하던 정렬(貞烈)·유덕(有德)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살을 지지는 것)을 받고 죽었다. 아무도 강빈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재위 24년(1646) 2월 3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억지를 부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고 몰래 도모해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왕비 복장)를 마련해 놓고 참람하게 내전(內殿)이라 칭호했다…이런 짓을 차마 하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는가?”(『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수종자들이 저들(彼人:청인)이 보고 들으라고 세자를 동전(東殿), 세자빈을 빈전(嬪殿)이라 칭한 것이지 세자와 빈이 자칭한 것은 아니라고 부기했다. 그러나 인조는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는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하루도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는 율문을 상고해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했다. 강빈을 사형시키라는 뜻인데 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시역(弑逆)이 어떤 죄인데 짐작만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한 것처럼 무리한 요구였다. 인조는 강빈의 사형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성문 밖으로 내쫓고 병조판서를 숙직시키며 경호를 엄하게 하게 했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은 “강빈을 폐할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강빈을 죽이시려면 신을 먼저 죽이신 연후에야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다가 귀양 갔다.

인조는 24년(1646) 2월 29일 강빈의 두 오빠 강문명(姜文明)·강문성(姜文星)을 장살(杖殺:곤장을 쳐 죽임)시키고 3월 15일에는 강빈을 덮개 씌운 검은 가마(屋黑轎)를 이용해 사저로 내쫓고 당일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인조실록』은 세자빈이 쫓겨날 때 “길가에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했다”며 “중외(中外)의 민심이 모두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빈을 죽인 인조는 과거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강빈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고문자의 의도대로 강빈의 이름을 댔고 인조는 안사돈인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어린 석철은 동생들과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사관(史官)은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소현세자의 영혼이 어두운 지하에서 어찌 원통해하지 않겠는가”(25년 8월 1일)라고 개탄했다. 사관의 예견대로 석철은 다음해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고 말았다. 둘째 석린도 석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비난에 직면한 인조는 나인 옥진(玉眞)에게 책임을 지워 고문해 죽여 버렸다.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의 끝은 가족 참살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인조는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초 그의 묘호(廟號)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고쳤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인물에게 쓴 어질 인(仁)자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내란과 외환으로 점철되었던 한 시대는 역사에 숱한 어두움을 드리우고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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