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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경에서 장관까지

운명 0 2520
순경에서 장관까지

운명도 노력하는 자에게

1965년 11월 미국 국제경찰학교에서 사 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후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낸 이열모 씨를 만났다. 내가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가 내 인생의 한 결정적 시기에 족집게 같은 예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미대 출신으로 조지워싱턴대학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던 그가 어느 날 내 관상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승진하겠습니다 그려.”

당시 승진한 지 2년 남짓밖에 안 된 풋내기 경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지 않았다. 3년도 안되는 경감이 총경으로 승진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엔 지금처럼 경감과 총경 사이에 경정이라는 계급이 없었고 더군다나 총경은 시험으로 승진하는 전례도 없었다.

“승진이 아니라 영전하는 관상을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관상학적으로 승진과 영전은 분명히 다릅니다. 내년 9월에 틀림없이 승진할 겁니다.”

이 교수는 아예 시기까지도 못 박으며 말했고 나는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웃어 넘겼다.

연수교육을 마치고 귀국한 때는 1966년 4월이었다. 귀국해 보니 치안국 내에서 총경 자리가 38자리나 늘어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당시 전국 경찰서는 1급지와 2급지로 구분되었는데 1급 경찰서에는 총경이 그리고 2급 경찰서에는 경감이 서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조직의 특성과 치안 수요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고려하여 규모가 커진 2급 경찰서장의 직급을 총경으로 한 단계씩 높인다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경감 중에서 총경 수요의 5배수를 추천 받아 총무처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뽑는다는 구체적 작업내용까지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경감 중에서 190위까지의 승진 후보자 순위 안에만 들면 일단은 시험을 칠 자격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도 내게는 반가울 게 별로 없었다. 경감에 승진한 지 3년 남짓된 사람이 그 많은 고참들을 제치고 190명 순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처럼 총경 승진이라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당시 치안국장은 박영수(朴英秀) 씨가 맡고 있었고 구자춘(具滋春) 씨가 서울시경국장을 그리고 채원식(蔡元植) 씨가 경찰전문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다. 구자춘 서울시경국장이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내 보직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는 말이 들려왔다. 얼마쯤 지난 뒤 내가 미국에서 폭동진압술을 깊이 있게 배웠다는 내용을 보고 받은 자리에서 구자춘 시경국장은 기동대장을 한번 맡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해 놓은 상태였다. 계급사회에서는 그 이상의 대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로 되지는 않았다. 구자춘 시경국장이 박영수 치안국장에게 내 보직에 대해 보고를 하였더니 “해외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람은 원래의 보직에 복귀시킬 것이 아니라 원칙대로 경찰학교에서 교관을 거친 후에 실무보직에 복귀시켜라” 하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 하여금 경찰학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교육을 전수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유학시킬 수 없던 당시로서는 그런 식으로라도 지식을 널리 전파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따라서 바로 경찰학교로 발령이 났고 나는 거기서 보안학과 과장을 맡아 후배들을 가르쳤다. 경찰학교에는 나보다 선배 경감들이 7, 8명이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보름쯤 후에 내무부 장관이 경질되었던 것이다. 엄민영(嚴敏永) 씨가 새 장관이 되었는데 그는 경찰 쪽의 인사를 단행하면서 서울시경국장이던 구자춘 씨를 경찰전문학교 교장으로 채원식 씨는 서울시경국장으로 맞바꿔 발령을 낸 것이다. 그때 구자춘 씨가 경찰학교에 부임하면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안 경감. 당신이 나를 끌어 왔구먼….”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구자춘 학교장은 내 경찰생활의 고비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으로 그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나에게는 그때부터 어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원식 씨가 경찰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던 경감 다섯 명을 서울시경으로 근무처를 옮기면서 모두 데리고 간 것이다. 나는 졸지에 경찰학교에서 고참 경감이 되었다. 이쯤 되자 해외교육 점수와 구자춘 교장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근무평점을 합하면 총경 승진시험 대상자로 추천될 수 있으리라는 실낱 같은 희망이 싹트게 되었다. 한술 더 뜬 행운으로 구자춘 교장이 나를 경찰학교 서울분교장으로 발령을 내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처럼 행운이 겹쳐져 전국의 총경 승진시험 대상자 190명 중 90번째인가 91번째로 추천되었다.

서울분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나름대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분교장은 가끔 특강을 하는 것 말고는 교육생의 교과목 편성운영과 교관들에 대한 지도 감독만 잘하면 되었으므로 웬만큼은 시간을 쪼개어 시험 준비에 열중할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기댈 언덕이 없는 처지였으므로 시험에 의한 총경 승진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엔 선풍기 하나 없었다. 연로한 아버님은 큰 얼음덩이를 사다가 공부하는 내 등에 얹어주곤 하셨다. 아이 셋 중 큰아이와 둘째 아이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시험공부에 방해될까 봐 발끝으로 마루를 걸어 다녔다.

승진시험 합격자는 모두 15명이었다. 합격예정 인원은 38명이었는데 고등고시에 버금가는 어려운 문제의 출제로 단 15명만이 과락 40점 전체 평균 60점의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얼마나 어려웠던지 사법시험 합격자가 낙방하기도 하였다.

사실 시험을 친 다음 내심 고민에 휩싸여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과락도 면하고 전 과목 평균 60점의 고비도 넘은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38등 안에 들어야 했기 때문에 도무지 안심이 안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함께 시험 본 동료들 모두가 나와 똑같이 불안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 역시 구자춘 교장으로부터였다. 총무처 장관실에 볼일이 있어서 갔더니 마침 총경 승진시험 결과 보고서가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나의 합격 여부가 궁금했던 구자춘 교장은 바로 확인을 했고 그 자리에서 즉시 전화를 걸어와 축하해 주었다. 그때 그 기쁨은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떨리도록 가슴 벅찬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정말 불가능했던 일이 기적처럼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쁨 속에서도 이열모 교수의 예언이 불현듯 생각났다. 나는 즉석에서 아직 미국에서 공부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데 첫째는 총경이 된 기쁨을 둘째는 정확하게 적중한 관상학의 신기함에 대하여 말하였다. 더군다나 내가 총경 승진 발령을 받은 날은 놀랍게도 1966년 9월 1일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관상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점까지 맞힌 셈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였다.

오랜 기간이 걸려야 할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이 어찌 그처럼 짧은 시간 안에 나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기적과 같이 움직여진 것인지…. 정말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이런 체험을 돌이켜 볼 때 세상일은 한 인간의 기대와 소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해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 운명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은 분명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타고난 ‘운명’이며 보이지 않는 ‘조물주의 섭리’라고 믿는다. 다만 그러한 운명의 찬스가 나를 향해 다가왔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부는 별개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맞을 준비를 해야만 비로소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큰사람 큰 발자국

총경으로 승진한 다음 처음 보직을 받은 곳은 치안국 외사과 3계장이었다. 외사 1계장은 박재식(朴在植) 총경이었고 2계장은 유흥수(柳興洙) 총경이었다. 당시 김봉균(金鳳均) 선배가 외사과장이었는데 무엇보다 그의 부하 통솔력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 선배는 한마디로 얘기해서 외사경찰을 창설하고 육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분이다. 또한 대개의 경우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시는 것이 조직의 관행이었는데 그는 부하들의 거의 모든 것을 책임지다시피 하여 단 한번도 아랫사람에게 밥값을 내게 한 적이 없었다. 업무 추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지원을 해 주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들어 준 다음에 독려하는 스타일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알아서 뭘 해 와라’ 하는 소리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부하들이 스스로 따르도록 하는 솔선수범의 업무 스타일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업무에만 충실하고 인간미가 없는 분도 아니었다. 우리가 외사과에 있을 때 김 선배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따금 마포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 이른바 동전내기 ‘섰다’를 즐기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끗발이 하도 좋아 수중의 돈은 물론이려니와 시계며 반지니 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두 손으로 싹싹 빌고 나온 적도 있었다.

이 무렵 외사과에서 함께 일했던 우리들은 ‘섰다’를 하면서 모두 별명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김 선배는 성질이 급하고 가끔씩 고함을 질러댄다 하여 ‘악선생’이었고 박재식 형은 꽁초도 마다하지 않고 연거푸 담배를 피워댄다 해서 ‘꽁초’로 불렸다. 유흥수 형은 제일 먼저 돈을 다 잃고 공짜로 열 번을 게임에 참여한다 해서 ‘목마(木馬)’ 그리고 나는 머리숱이 드러난 대머리라 해서 ‘독두(禿頭)’였다.

한번은 지금의 세종로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올라가다 보이게 되는 모퉁이 음식점인 ‘석연’ 자리의 친구 집에서 밤새는 줄 모르고 놀다가 새벽에 나와 보니 우리 일행이 타고 온 지프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없는 낭패를 당한 적도 있다. 이 일을 어쩌랴 싶었지만 사실 그 지프는 김 선배가 업무 추진을 위해 어디에선가 구해온 것일 뿐 경찰 관용차량은 아니었다.

당시 치안국 외사과는 차량이며 무전기·타자기 등 행정 장비가 풍족하여 다른 부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미군과 협조하여 얻어온 김봉균 과장의 역량 덕분이었다.

아무튼 김 선배는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능력이 있다 싶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외사과에 데려와서 아주 유능한 경찰관으로 만드는 기술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일할 때 태국의 국제마약단을 검거한 사건이 있었다. 마약단은 그 배후에 태국의 현역 장성까지 포함돼 있을 정도로 큰 조직이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건선 경사를 공작원으로 투입하여 수사에 개가를 올렸던 한국 최초로 대규모 국제마약단 조직을 검거한 쾌거였다.

그 사건은 태국의 국가적 위신 문제가 고려된 때문에 보도관제로 사회면의 일 단짜리 기사로 축소되어 넘어가야만 했다. 태국이 6·25전쟁 때 한국을 도와준 혈맹이고 그 당시에도 경기도 포천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1개 중대가 상징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배려 때문이었다.

김 선배의 보스 기질이나 리더십은 당시 국무총리도 알아줄 정도였다. 1967년 여름 김봉균 과장을 수행하여 월남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일행이 월남에 머물고 있을 때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가 티우 대통령의 취임 축하사절로 월남을 방문했다. 공항에서 영접행사가 있은 다음 월남의 경찰 경호 차량이 정일권 총리 일행을 에스코트하여 사이공 시내로 막 들어가는 순간에 우리 일행의 차가 그만 그 대열을 앞질러 버렸다.

공식적인 의전으로 보나 평소 국무총리에 대한 예절로 볼 때에도 매우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정일권 총리로서는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자신을 앞질러 간 사람이 김봉균이라는 것을 알고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나는 ‘보스 김봉균’의 진면목을 한층 더 잘 알게 되었다.

그가 외사과장을 맡고 있을 때 외사과와 함께 해외 주재관 제도가 창설되었으며 해외 첩보수집이 가장 활발했고 해외 주재관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다고 회상된다. 그 밑에서 나를 포함한 박재식·유흥수·정시채(丁時采)·유내형(柳來馨)·이해구(李海龜) 그리고 박일용(朴一龍)에 이르는 외사경찰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에다 인간미까지 겸비했으니 어느 구석 모자람이 없었는데 김 선배는 그만 치안감에 그친 채 경찰을 떠나야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그를 시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가 경찰을 떠난 것은 김치열(金致烈) 내무부 장관과 김성주(金聖柱) 치안본부장 때였다.

김 선배는 지금도 경찰을 위해 남모르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항공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데 경찰을 그만 둔 사람이나 그 자녀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며 또 퇴직 공직자들을 위로해 주는 일을 도맡고 있다. 또한 주한 미군이나 미국대사관 등을 상대로 하는 국제업무에 정부가 나서기에는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대리 역할을 많이 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재야 외무장관’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김 선배가 나이 마흔이 넘어 혼례를 치를 때 하와이에서 하객들이 비행기를 전세 내어 60여 명이 들이닥쳤었다. 아마도 경찰총수를 지냈더라면 경찰조직 발전의 속도가 배가되었을것으로 생각되어 아쉬움이 크다.

내가 김봉균 치안감에 대해 소소한 일상조차 얘기를 하는 것은 사실 그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도자란 그리고 인간이란 어떤 덕목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 역시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모범적 면모를 본받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김 선배는 내 인생의 스승이며 교과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권한이 크면 클수록

1968년 12월에 주월 한국대사관 파견 명령을 받았는데 내가 그곳에 가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1967년 월남경찰 총책임자인 로안 장군의 초청을 받은 김봉균 치안국 외사과장을 수행하여 월남을 방문했을때 우리 일행을 맞은 로안 장군이 이런 얘기를 했다.

“한국의 군인 5만 명과 근로자 2만 명 정도가 월남에 와 있는 상황인데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월남사람과 한국사람 그리고 한국사람과 한국사람 사이에 금전·폭행·사기 등 분쟁도 빈발하고 있고요. 이처럼 복잡한 문제는 한국경찰에서 직접 처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로안 장군의 얘기는 주권국가의 경찰 책임자로서는 큰 아량이었다. 해외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대개 ‘속지주의’원칙에 따라 해당 국가의 경찰이 처리하는 것이 국제적인 제도이고 관례다. 때문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한국인의 사건 사고를 한국경찰에게 맡기겠다는 것은 대단한 양보인 셈이다. 월남경찰의 요청은 즉각적으로 우리 정부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고 내가 첫 파견근무를 맡게 되었다. 아마도 월남과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정부에서도 신속히 내린 정책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월남에는 ‘어글리 코리안’이 적지 않았다. 내가 가기 전에는 대사관의 영사가 중앙정보부와 군 보안사령부 그리고 주월 한국군 범죄수사대 파견 직원의 도움을 받아 말썽 피우는 한국인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보안대와 범죄수사대(CID) 요원이 처리한다고 하지만 민간인에 대한 처리이다 보니 혼란도 적지 않았고 일관성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업무인수를 받고 난 후 나는 범죄 유형별 처리지침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 경찰 역사상으로도 그러한 업무가 최초였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여 형사처분을 받아야 할 자와 강제로 송환시켜 방면할 자 그리고 현지에서 여권을 회수하여 신분상의 제약을 주면서 채권·채무·민사 조정 등 문제를 해결한 다음 계속 취업하게 할 자로 구분하여 처리하는 지침을 만들었다.

세 번째 방법을 도입한 것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서 강제로 송환할 경우 피해자의 상당한 재산상 손해를 치유하지 못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피의자를 송환시킬 경우 군용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비행기 편이 생길 때까지 혐의자들을 구류 처분해야 하는 데에다 강제송환 당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재월 한국인 범법자 처리규정」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총영사·공사 그리고 대사의 결재와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협조를 받아 범법자들을 처리하였다. 한번은 부부가 찾아와 딱한 사정을 하소연했다. 캐나다로 이민 가기 위해 모아 놓은 돈 7000달러를 빌려 줬는데 도무지 갚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당사자를 불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뒤에 채무자의 여권을 회수하여 대사관에서 보관한 다음 변제기간을 정해 빚을 갚도록 종용했다. 여권을 압수당했으니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다. 아마 6개월에 걸쳐 피해자 부부에게 나누어 갚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때 돈을 돌려받은 부부가 오랜 세월이 지나 내가 치안본부장이 되었을 때 찾아와 당시의 고마움에 대해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들로서는 인생의 큰 고비에서 나를 만난 셈이었으니 두고두고 고마웠던 모양이다.

내가 월남에서 근무할 때 일을 처리하면서 처리규정 원칙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삼 년 동안 월남에 있으면서 260여 명 정도를 강제 송환하고 하루에 한 건 정도의 범죄나 분쟁을 현지에서 해결했으니 모두 1000여 건을 처리한 셈이다. 그 많은 사건을 처리했음에도 직접 불평불만을 들어 본 기억이 없으므로 그만했으면 공평했노라고 자부한다.

당시 그곳에 파견 나와 있던 중앙정보부 이대용(李大鎔) 공사와 이제는 유명을 달리한 이문우 참사관도 “안 총경이 일 처리하는 것을 보고 경찰에 대한 그간의 선입견을 버렸소. 앞으로도 소신껏 잘해 주시오” 하는 부탁 겸 격려를 해 주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역만리에 돈 벌러 와서 고생하는 기술자들 사이에서도 ‘대사관의 안 총경’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가 내 귀에 들려왔다. 좋은 쪽으로 이해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일에 대한 공정성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에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내 공직관과 크게 무관하지 않았다. 심정적으로야 헌병·중앙정보부 관계자·주월 한국군 범죄수사대 정보 관계자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으니 형평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경찰의 자존심도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더 크게는 ‘공직자는 임명권자가 보이지 않는 데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소신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건너온 민간인들은 어려움 속에서 돈을 벌고 인생을 성취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릇된 판단을 내리면 그들이 평생 억울함을 안고 살 것이라 생각하니 공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채명신(蔡命新) 주월 한국군사령관·이세호(李世鎬) 사령관·김용휴(金容烋) 부사령관 등의 깊은 관심과 보안사령부·범죄수사대의 아낌없는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

공정한 판관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갖가지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나의 공직관이 서 있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주변의 청탁이나 압력을 물리쳐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한번 공평성을 잃으면 영영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시종일관하자 나중에는 그들도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대쪽 같은 나의 일처리로 가까운 사람 중에 혹여 서운했던 분이 있었다면 이 책자를 빌려 이해를 바라고 싶을 뿐이다.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의 대사는 신상철·유양수(柳陽洙) 씨였으며 박영(朴英) 씨가 총영사를 그리고 이대용 씨가 중앙정보부 공사를 맡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이 매우 컸던 것도 빼놓을 수 없으며 이제는 모두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다.

억울한 사람 약한 자의 편에서 일했던 월남 근무 3년. 권한과 재량권이 클수록 공정을 앞세운다면 공무집행에 있어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또한 법과 제도가 다소 미비해도 사심 없이 공무를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내가 입법·사법·행정 세 가지 영역의 업무를 동시에 처리했던 유일무이한 공무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가장 큰 자긍심으로 남아 있다.

김세원(金世源) 공사 댁은 사이공시 환딘풍 104번지였다. 베트콩의 출몰 때문에 교외에서의 여가 선용이 불가능했던 관계로 간간이 즐기는 김 공사 댁에서의 대사관 직원들의 포커가 유일한 오락이었다. 또한 탄손누트 국제공항 부근에 9홀의 골프장이 있었는데 정오 휴식(시에스타) 시간과 주말에 열심히 배워 싱글 핸디캡 인증서를 받을 정도가 되었다.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에는 각 부처의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김종규 전 서울신문사 사장이 부대사였다. 송영식 전 월드컵유치위원회 사무국장이 유양수 대사 비서관이었고 신정균 대령이 무관, 노진식 씨가 상공부 상무관이었으며 총무과장은 이지철 씨 그리고 이경식(李經植) 전 경제부총리도 함께 근무했다. 그리고 이한철·최용찬·송한호 씨도 주월 한국 대사관(KCIA)에서 함께 일했다. 또한 홍순길(洪淳吉) 전 서울시 부시장이 건설담당관을 장명관 전 인도네시아 대사와 이병록(李炳錄) 씨가 정무담당 서기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왔던 이대용 공사는 월남이 적화통일 되었을 때 사이공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3년 동안인가 호치민 치하에서 억류되어 있다가 정부의 오랜 외교적 노력으로 간신히 풀려나온적이 있다. 내가 충남도지사로 근무하던 1985년에 사무실로 찾아와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공산 치하에서 얼마나 맘고생 몸 고생이 심했는지 저녁을 나누면서 들어 본 고생담은 몸서리 쳐지도록 끔찍할 지경이었다. 이 공사는 지금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민간운동의 선봉에서 일하고 있다. 존경스럽기만 하다.




위장 자수간첩 이수근

정부로부터 파견 명령을 받고 내가 월남의 수도 사이공에 도착한 때는 1969년 1월 초였는데 당시 나의 신분은 경찰 총경에다 외무부 3등 서기관 그리고 중앙정보부 해외첩보 수집요원(IO)의 세 가지였다.

1969년 1월 29일. 조용하던 주월 한국대사관 사무실에 본국의 긴급훈령이 하달되었다.

“자수간첩 이수근(李穗根)이 한국을 탈출하여 홍콩에서 사이공을 경유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으니 그의 항로를 즉시 차단하고 체포하라.”

본국 중앙정보부(부장 金炯旭)의 숨 막히는 지시였다. 이수근은 판문점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의 시선을 집중 시켰던 거물 귀순자였다.

이대용 공사를 중심으로 우리 대공요원들은 긴장된 얼굴을 마주하고 즉시 체포 작전회의에 돌입하였다. 우리 대공요원 10여 명은 서로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먼저 이수근이 탑승한 비행기가 도착하면 그를 체포할 때까지 공항에서 비행기의 이륙을 금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권국가로서의 월남이 과연 한국이라는 한 우방의 첩자 색출을 위해 그것을 허락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이 일은 이대용 공사가 맡았다. 이 공사는 티우 월남 대통령과 오키나와정보학교 동기생으로 대통령궁을 무상출입하는 유일무이한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이문우 참사관은 사무실에 남기로 했다. 수시로 본국과 긴급연락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윤희 1등 서기관(육사 11기)과 내가 최후의 체포조로 되어 이계연 서기관·이한철 서기관 등과 함께 권총으로 무장한 채 지프를 타고 공항으로 황급히 달려 나갔다.

사이공 탄손누트 국제공항.

우리의 초조함과 일시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이 전면 금지된 공항 활주로는 금세 팽팽하고 무거운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이미 정보를 입수했던 대로 ‘캐세이패시픽’의 전면과 후면에는 트랩이 설치되어 있었다. 비행기 뒤쪽 출입문 입구에서 이수근 일행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어 바깥의 형편을 살피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우리는 그를 내려오도록 해서 바로 체포하였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간 이윤희 서기관과 나는 객실 앞쪽으로 빠르게 다가갔고 동시에 뒤로는 이계연·이한철·황정식 서기관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면서 밀착 합세하였다.

“이 선생. 나 좀 봅시다.”

내가 먼저 접근하며 말했다. 그는 조종실 뒤쪽의 다섯 번째 좌석에서 영자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국대사관에서 나왔는데 잠깐 내려서 얘기 좀 나눕시다.”

나의 두 번째 채근이 단호하게 이어졌다.

“이 비행기는 영국 소속으로 영국 영토나 다름없는데 당신들이 맘대로 내려라 마라 할 권한이 있소?”

그는 나름대로 논리를 제시하며 반항했다.

“외국승객이 보고 있는데 창피하지 않소? 어서 내립시다.”

거듭된 나의 권유에도 그가 계속 불응하자 약간의 손을 보아 기를 꺾은 다음 기내(機內)에서 끌어내렸다. 그는 이미 가발과 콧수염을 떼어 버린 형색이었다. 지프에 태워 오면서도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했다. “아무런 심문도 하지 말고 본국으로 즉시 송환하라”는 본국의 엄격한 훈령에 따라 우선 대사관으로 호송하였다.

이튿날인 1월 30일 본국 송환을 위해 주월 한국군사령부 C46 특별군용기를 이용했다. 긴 항로라서 비행 중간에 필리핀의 클라크 미국 공군기지에 기착하여 충분한 급유를 받았다. 행적이나 탈출에 대한 심문은 하지 않았지만 이윤희 서기관과 함께 호송하면서 그의 신변에 관해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는 소련의 첩보영화 얘기를 하면서 첩보요원이 탈출하는데 그의 애인이 돕더라는 줄거리를 꺼냄으로써 간접적으로 나를 회유하는 교활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또 자수 이후 자유를 누리던 시기에 있었던 가수 ㄱ 양과의 숨은 얘기를 털어놓기도 하였다. 서로 호감이 갔던지 가끔 그 여성의 집을 방문하였던 이수근이 어느 날 엉큼한 마음을 비쳤던 모양이다. ㄱ 양은 “목욕이나 하라”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그를 유도한 뒤 문을 잠근 채 집 밖으로 도망했다며 그녀를 마구 비난하기도 했다.

또 “한국으로 송환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제 죽게 되겠지요?”라고 물으면서 불안감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당신을 감싸 준 한국을 왜 저버렸는지 솔직히 털어놓으면 어떤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달래주기도 했다. 그래도 불안해 하는 것 같아 신경안정제를 주기도 했다.

탈출 동기에 대해 그는 “모 기관의 감찰실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위장간첩이 아니냐면서 극히 의심하는 통에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그랬노라”고 억울한 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행선지를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택하지 않고 왜 하필 캄보디아로 택했는가? 캄보디아는 북한과 수교국일뿐더러 시아누크 왕이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있지 않은가? 프놈펜으로 가면 곧 평양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마 모를 리는 없었을 텐데?”

내 질문에 그는 묵묵부답으로 반응하였고 그래서 나는 그가 위장 귀순했을 것이라 의심했다.

탑승객이 불과 몇 사람뿐인 거대한 C46 특별수송기가 눈이 하얗게 쌓인 김포공항에 착륙한 때는 새해 정월이 저무는 31일 밤 12시였다. 창밖으로 보안요원들이 분주히 오가는 것이 보이자 ‘이제 임무가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큰 파도처럼 밀려왔다. 월남에 파견된 지 꼭 한 달 만에 부닥친 큰일이었던 것이다.

이수근 탈출사건이 어찌 우리 대공요원들만의 일이었겠는가. 본국의 훈령이 떨어지면서 그를 무사히 압송할 때까지 신상철 대사를 비롯하여 한국대사관 직원 모두는 얼마나 긴장했던가. 그리고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 모두 큰 관심으로 지켜보고 응원해 주었다.

만일 그를 체포하지 못했더라면 대한민국의 체면은 어찌 되었을까? 이웃 나라의 첩자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한 나라의 수도 국제공항에서 한동안 비행기들이 이륙하지 못하도록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5만의 우리 국군이 참전하고 있었던 국력이었고 또한 순발력 있는 한국대사관의 외교력이었다. 우리 한국의 해외 정보능력 그리고 수사력이 세계의 심판대에 올랐던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미국의 CIA·구소련의 KGB·이스라엘의 모사드. 이것은 바로 그 나라 정보와 국방력의 상징일 것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정보망들이 한눈으로 지켜보던 숨 막히던 그때가 해마다 눈발 날리는 정초가 되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손에 땀을 쥐게 된다.

판문점을 넘어 귀순하여 모 대학의 여교수와 혼인하여 가정까지 꾸렸던 그였다. 자유민주주의를 진심으로 알지 못하고 위장간첩으로 되돌아가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상의 견고함 때문일까 아니면 목숨을 건 임무가 있었기 때문일까?




마포서장의 두 가지 소신

1972년 2월에 3년 동안의 월남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처음으로 ‘경찰의 꽃’인 일선 서장을 맡게 되었다. 바로 마포경찰서장이었다.

마포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나는 마음속에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중 하나는 ‘엄격한 신상필벌’이고 또 하나는 ‘공정한 인사’였다. 경찰은 어느 공(公)조직보다도 지휘 통제력과 결속이 중요한데 원칙과 공정이 결여될 때에는 아랫사람들이 진심으로 따라주지 않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경찰서장이 되기 전부터 이 같은 소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마음껏 펼쳐보자는 의욕이 넘쳐났다.

나는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지휘방침을 설명했다.

“나는 엄격한 신상필벌과 공정한 인사 이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경찰서장의 업무에 충실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비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에게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잘 보이려고 하는 직원이 있다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 후 즉시 파출소를 A B C 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순환보직을 시행했다. 어느 조직이든 이른바 좋은 보직과 그보다 못한 보직이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공평하려 해도 상대적으로 근무하기 수월한 부서가 있게 마련이다. 음지와 양지를 놓고 서로 가려고 하거나 가지 않으려고 불평하는 폐해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순환보직을 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교통경찰도 예외 없이 보직을 순환시키자 가장 좋아한 사람은 직원들이었다. 거기에다가 나 자신이 직원들로부터 대접을 안 받겠다는 약속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상사 눈치 볼 필요도 없었고 명절 같은 때 고민할 필요도 없어져 얼마나 홀가분했겠는가. 그러한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 나갔다.

그 대신 주민을 상급자같이 섬기라는 주문을 계속해서 요청하는 한편 부족한 인력 때문에 생기는 업무 공백을 메우려고 마음을 썼다.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어머니 방범위원회’를 비롯한 민간 치안 지원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한 손으로는 등을 밀고 한 손에는 당근을 들고 밤낮없이 뛰었는데 장애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마포경찰서는 변두리 경찰서로 인식되어 마포서로 발령나면 좌천된 것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직원들 중에는 징계를 받고 밀려난 사람과 마포서를 공직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해서 꼭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과 변두리 경찰서에 근무하는 것에 대하여 열등감을 갖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시 서울시경국장은 이건개(李健介) 씨였는데 시경에서 도범검거 강조기간을 설정하고 범죄소탕 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다. 당시 마포경찰서는 경찰서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서울시경 산하에서 3위권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당시 방동환(方東煥) 형사과장을 중심으로 330수사대를 운영하는 등 전 직원이 정말 하나같이 움직여 주었다. 그때 방 과장이 간부후보생 출신인 이무영(李茂永) 경위를 추천하므로 330대장으로 발탁하여 소매치기 조직 검거 등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따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내가 직원들에게 내걸었던 약속을 모두 지켰기 때문이라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원칙대로 열심히 일해도 앞에서 아부 잘하고 잘 보인 사람들에게 좋은 보직을 빼앗기고 또한 좋은 곳으로 발령 받아 가는 것에 허탈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상필벌과 공정한 인사를 하는 나로부터 용기를 얻어 열심히 노력한 결과 마포서가 전례 없는 성과를 올리고 전 직원의 사기가 올라간 것이다. 더구나 서장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평소에 활동비나 내미는 관행을 근절하니까 그것처럼 마음 편한 일이 없었다는 뒷소식이었다.

내가 마포경찰서에 근무한 기간은 약 7개월에 불과했지만 마음속에 간직했던 소신을 처음으로 펼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좋은 결과를 거두어 더 없는 기쁨과 만족도 얻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를 따른 직원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역시 음지와 양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 하기 나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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