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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새 4배 올랐지만 겨우 먹고살 정도

조아라 0 1462
15년새 4배 올랐지만 겨우 먹고살 정도



[경인일보=김명래기자]비오는 날이면 동사무소(현 주민센터) 공무원들이 창고에서 끌과 비닐봉투를 들고 동네의 불법 벽보를 떼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한 풍경이었다.

20년이 지나 \'미래도시\'를 이야기하는 인천의 현 시점에서 우스갯소리로 들어 넘길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선 공무원의 주된 관심사는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었다. 동사무소끼리 \'환경정화 경진대회\'를 열어 경쟁하기도 했다. 공무원의 생활상을 비롯해 도시의 지향점도 20년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관련기사 3면

공무원은 평생고용이 보장돼 소위 \'신의 직장\'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산층으로 부를 만하다. 모든 정책은 중산층을 표본으로 삼아 수립, 시행된다. 정책 시행의 주체이면서도 그 혜택을 받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공무원이다. 20년전과 지금의 공무원 생활 수준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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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인천 가정2동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김성직(가명·현 6급)씨는 첫 월급으로 30만원가량을 받았다. 당시 군 미필자의 9급 1호봉 기본급은 22만2천500원. 김씨는 \"공무원이 되기 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은 시급 1천200원보다 못한 수준이었다\"고 했다. \"비오면 벽보 떼고, 저녁이면 불법 포장마차 철거하러 가는 게 당시 동사무소 공무원의 주 업무였다\"고 김씨는 기억했다. 1991년 공무원의 남·여 구분모집 전형이 없어지면서 합격자의 60%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하나워드프로세서\'를 다루는 서무를 뺀 나머지는 현장에서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성인 버스요금이 100원이었고, 술집에서 파는 소주값이 700원 하던 때였다. 동료 3~4명이 일 마치고 중구 \'삼치골목\'에서 거나하게 취하는데 술값 1만원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고참이 책상 서랍 안에 당직비 5천원을 두고 간 날이면, 아무말 없이 숙직을 서야 했다. 부족하지만 30만원으로 저축도 꾸준히 했다. 2009년 현재 초등학생 딸을 둔 김씨의 월급에서 과외비(40만원), 대출이자(56만원), 아파트관리비 등을 빼면 남는 게 거의 없다.

인천 부평구청에서 근무하는 장승준(가명·9급)씨는 민간기업을 다니다 지난 2007년 8월 공무원이 됐다. 군대에 다녀온 장씨의 기본급은 91만9천600원. 각종 수당 등을 모두 합해 130만원 정도를 첫월급으로 받았다. 이전 직장에서 받던 것의 70% 수준이었다. 공무원 기본급은 2년째 동결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공무원으로 처음 맡은 업무는 사무실에 앉아 민원대장 발급하는 일이었다. 함께 들어온 일반직 공무원 10명 중 7명이 여성이었다. 간부를 제외한 직원 중 남성이 1명뿐인 부서도 있다고 했다. 이 부서의 회식장소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장씨는 부하직원에게 술을 강요하는 일도 없고, 부서장이 참석하는 회식이라도 개인 사정이 있는 직원은 빠진다고 한다. 가계 사정에 대해 장씨는 \"부의 증식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은 딱 먹고 살 정도\"라고 했다. \"이전 직장에서 모았던 것을 조금씩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몇 년 전부터 주식에 투자하는데 최근 \'두바이 쇼크\'로 투자 원금에서 20~30%를 손해봤다는 말도 했다.

기능직 -> 일반직 전환 가장 잘판린 수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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