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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 영양출신 의원 조헌영에 대하여

히니 2 1735

1901년에 영양에서 태어나 1988년 북한에서 사망한 조헌영은  한민당 소속으로 제헌의회 영양출신 국회의원이자  2대 무소속 국회 의원이다,


 또한 민족운동가이며 한의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문(應文), 호는 해산(海山)이다. 경상북도 영양 출생으로   조인석(寅錫)의 둘째 아들이며,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다.

어릴 때 의병대장이었던 할아버지 승기(承基)와 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 등의 한학을 익히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닌 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 재학중인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동경(東京) 지회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귀국하여 1929년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에는 한의학 연구에 몰두하여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하였다. 이때의 연구로 근대 한의학을 개척하여 오늘날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1950 년 5·30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김동성(金東成)과 함께 무소속구락부를 이끌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는데, 북한에서는 주로 한의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김일성주석의  한방 주치의로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1988 년 5월 23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근대 한의학 개척자로서, 1930년대 「신동아(新東亞)」에 한의학의 학술 논문을 연재하였고, 1934년부터는 「한의학원론(漢醫學原論)」에 이어서 「폐병치료법」, 「신경쇠약치료법」, 「위장병치료법」, 「부인병치료법」등을 간행하였다.

최근 국내에서 발간된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은 조헌영의 1930년대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도 개론서로 읽히고 있는 「통속 한의학원론(通俗 漢醫學原論)은 국내 한의과대학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읽고 기본교재로 공부하는 유명한 저서이다. 

주실 조씨중  영자(泳字) 항렬 가운데서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은영(趙銀泳, 1896∼1970년), 조헌영(趙憲泳, 1899∼1988년), 조준영(趙俊泳, 1903∼1962년), 조애영(趙愛泳, 1911년∼) 4남매가 그렇다. 은영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헌영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의 유명한 한의학자이고, 준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초대 민선대구시장, 경북도 지사를 지냈으며, 애영은 여류 시조시인이다.

이중에서 조헌영이 바로 조지훈의 부친인데 한의학의 대가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납북된 뒤에도 한의학을 계속 연구하여 많은 한의학 제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상당수의 이북 한의학자들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

조헌영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한다. 영문학도인 그가 엉뚱하게도 한방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원래 조헌영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 머물며 허헌(許憲)이 회장으로 있던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다. 귀국한 후에도 신간회 총무 간사를 지냈는데, 신간회가 해산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는 방편으로 서울 명륜동과 성북동에 ‘동양의약사’라는 한의원 간판을 달고 의원 행세를 하며 광복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동양의학사’ ‘통속한의학원론’ 등 전문 한의학서를 여러 권 저술했는데, 한때 한의과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됐다. 이 책자에 대해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병운(金秉雲) 교수는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적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입문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의사 일 외에 조선어학회가 주관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심의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고향에서 한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민족 반역자를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했다.


 2대 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연속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때 납북됐는데, 북한에서도 한의학 연구서를 내는 등 북한 한의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북한은 88년 5월 평양방송을 통해 ‘조헌영이 노환으로 작고했다’고 그의 별세를 보도했다(조선일보 ‘新名家’, 1995.6.12일자에서 인용).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국민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예 교수로 있는 조동걸교수가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기술한 ‘주실이야기’를 보면 1930년대에 조헌영이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서 동네 초동(樵童)들을 데리고 경북 영양 일월산을 누볐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조지훈의 부친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영, 헌영, 준영, 애영 4남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바로 조인석(趙寅錫, 1879∼1950년)이다. 영자 위 항렬은 금(金)인 석자(錫字)이다(金生水의 이치). 조인석은 1900년 경 서울에 올라가 개화가 대세임을 목격하고, 동네에 돌아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종가이자 자신의 집인 호은종택에 설치한다. 그는 ‘초경독본(初經讀本)’이라는 청소년용 교육 책자를 저술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셈이다.

조인석은 자식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했지만 그 자신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기에는 6·25 전쟁의 비극이 개입돼 있다. 당시 그의 3남인 준영이 경북도경국장을 지내고 있었기에 아버지인 조인석은 좌익 청년들에게 매일 시달렸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집에 들어와 “이 영감! 아들 어디에 있어? 아들 찾아내?” 하면서 칠십노인에게 반말로 모욕을 가하자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처 방죽으로 가서 투신 자살하였던 것이다. 

조인석의 자살도 주실 조씨들의 전통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심과 목숨 중에서 자존심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칠십 나이가 되면 어지간한 수모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 마련인데, ‘삼불차’의 지조를 중시하였던 선비 조인석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로부터 이런 치욕을 받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조인석은 조지훈의 직계 조부다. 1950년 당시 30세였던 조지훈은 칠십 조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인석의 부친 선비중에 선비였다.  석자 위 항렬은 토(土)로 기자(基字)다. 조인석의 부친 조승기(趙承基, 1836∼1913년)는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하였다. 조승기 역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였던 것이다. 

2 Comments
인물 08-07-18 09:14:12  
아주 아까운 인물이 납북되었군요,  월북인지 납북인자 잘모지만
국내에 남았다면  한의학이나  영양발전에 기여을 하였을것인데
안타깝네요
히사모 08-07-18 09:32:06  
히니선생님이 누신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언어로
민초의 시대를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