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은 답변이 필요없는 자기 주장, 하고싶은 이야기, 기타 의견 등 직협 회원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 다만, 아래와 같은 경우에는 예고 없이 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
   - 특정기관·단체·부서·개인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경우
   - 상업성 광고 및 직장협의회와 무관한 내용 등  

전 남효채 영양군수 신문사 특별기고

군민 0 1786
2009년 01월 21일 (수) 14:44

특별기고

다음 글은 구구한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 최근의 논란과 관련하여 남효채 전 경북도 행정부지사가 본인의 마음 속 심정의 일단을 글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알듯 모를 듯한 문맥들이 많지만 공천경쟁과 낙천 등 짧은 시간에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던 지난해 4월 총선 당시 최종적으로 출마사퇴를 결심하기까지 복잡한 본인의 심경을 표현한 내용이어서 본사에서는 최근의 논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 본인의 허락을 얻어 전재(全載)합니다. 문장(文章)이라는 것이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각자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전제(前提)로 하고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全文)을 게재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편집자주>




- 영양-영해 간의 「창수령」(蒼水嶺), 그 무창고개 -

선거가 있던 해 4월, 공천에서 떨어지고 길을 나섰다.(사흘 후인가?)

형언할 수 없는 빈 마음을 안고, “계속 뛴다!”는 허(虛)한 말만 하고 다니던 중 아침에 문득 영양을 가고 싶었다.(20년 전 초임군수를 그 곳에서 했고 이번 선거구 중 일부였다.) 가서 삼촌같이, 형님같이 지내던 분 얼굴 한 번 보고 씩! 웃고는 돌아나와 「무창고개」를 넘어 영해로 가는 길을 잡았다.

그 고개는 이문열의 소설 ‘그 해 겨울’(젊은 날의 초상 3부)에 나오는 「창수령」이다.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자라목이재’라고 불려온 험한 고갯길이다. 이문열의 고향인 영양과 동해안을 잇는 길인데 지금은 말끔히 포장되어 있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험한 흙길 고개였다.(그 소설의 주인공, 찢어진 마음을 안은 ‘영훈’(이문열의 젊은 날이었으리라)이 유서와 약병이 든 가방을 짊어지고 눈이 펑펑 오는 잿길을 넘어 영해바다를 향해 걸어 넘던 고갯길이다.)

승용차가 고개를 따라 느릿느릿 굴러가니 30대 후반 그 곳에서 군수로 근무할 때 몇이 어울려 가재를 잡던 추억이 떠오르며 눈물이 ‘목울대’까지 꽉꽉 차 올라왔다. 농민운동을 하는 단체의 사람들과 같이 도농(道農) 산천(山川)을 뛰며 정열을 쏟았던 수많은 날들, 주민들이 「군수전출 반대운동」을 벌여줄 때 느낀 뭉클한 가슴과 반성들, 그 이후로 ‘좋은 사회’에서 사는 ‘좋은 공무원’이 되고자 공직(公職)에서 올바르게 일해 왔던 많은 나날들에 대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거(選擧) 같은 일도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나의 무지(無知)에 대한 회환(悔恨) 때문이었다.

차가 고개중턱 밑에 다다랐다. 담배를 산다며 집사람(그 몇 일 간 참 착했던)을 차에 놔두고 쓸쓸한 길옆 구멍가게에 들러 가게주인 노인에게 말을 걸며 소주 한 병을 샀다. 안주는 새우깡이었고...

한숨쯤 있으니 동네의 중노인 두 분이 가게 안에 들어왔다. 누렇게 좁은 툇마루에 같이 걸터앉아 한 병을 더 산 소주로 한 잔씩을 권하니 그 분들 한 잔을 마시고는 ‘어디서 본 분 같다’면서 후덕한 얼굴에 뜨뜻한 눈길을 보내며 ‘어디 사는 분인교?’라고 물어왔다. 한참을 있다가, 아마 슬픈 웃음 담긴 얼굴이었으리라... 그런 얼굴로 “허허! 남효채 군수입니다”라고 답했고 그 중노인들. 오래 전 객지 나간 ‘대소가(大小家) 사람’(촌에서는 10촌 넘는 정도의 친척을 이렇게 불렀다)을 읍내 장터에서 만난 듯 후다닥 일어서더니, “그렇지, 그렇지, 우리 남 군수님이구나!”하며 내 두 손을 꽉 움켜잡고는 노인답지않게 울먹거렸다.(내 느낌에는 그때 그 중 한 분의 눈길은 약간 퀭하게 변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시는 말.

“그때 우리 두 사람은 마을이장을 했는데... 우리 남 군수님이 이번에 우리 국회의원이 돼야 되는데, 이런 사람이 돼야 되는데 했지, 공천 될 줄 알았는데...”

그런 거였고, 그 끝말이 사투리 그대로 옮기면 “그러나, 우예겠노!\"였다. 한참이나 아득했고 나는 그때 느꼈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좀 더 잘 살아야겠다는 것을...

깡촌 썰렁한 마을에서 늙어 농삿일하면서, 세상의 좋은 일 바라며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 세상이 어쨌으면 좋겠다는 것은 각자가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단지 말이 없을 뿐이지.(공천이야기가 아니다.)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도 이 사회에 바라는 염원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뛰어주는 가까운 이웃이 있으면 그들이나 나나 모두 덜 허전하고 한층 더 살맛 같은 거 가질 수 있겠다’ 싶었다.

꼭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좀더 따뜻한 피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무창고개」의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어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 되도록 해 줍소서하는 막막한 기도의 마음을 가지며 나는 이제 못따라 간다는 패열감, 그러나 다른 데서 나도 비슷한 할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같은 것을 안고 구멍가게를 나와서 그 고개를 넘었다. 영해바다로는 굳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출마사퇴 선언을 하였고, 대구에 계신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단 한 분 뿐인 어머니를 뵈러 갔다.


► PS : 어머니를 보는 그날(어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다.) 나는 어머니한테 “신에게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기도하고 남는 시간에 그들이 가진 땀과 재물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주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