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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야화

꼬꼬댁 0 1428
날밤새며 노는것처럼 신나고 피곤한 일은 없다.
근데 고려인들은 60일에 한번씩,일년이면 여섯 번을 했다고 한다.
온 국민이 60일마다 한번씩 밤을 꼬박 새며 놀았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고려인들이 60일에 한번씩 백야의 축제를 벌였던 그날은 육십갑자로 세어 경신일(庚申日)
에 해당한다. 당시 도교에서는 이날 아무런 형체도 없이 사람의 몸에서 기생하는 삼시충(三尸蟲)이라는 놈이 사람이 잠든 틈을 타고 외출을 한다고 믿었다.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온 삼시충은 곧장 하늘로 올라가서 상제를 만난다.
그리고 지난60일 동안 자신이 숨어지냈던 몸의 주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낱낱이 일러바친다. 그러면 상제는 죄질에 따라 벌을 주는데,그 벌은 수명단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 삼시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아예 밤을 세워 술마시고 놀았으며 이것을 경신수야(庚申守夜)라고 했다.

도교에서는 하늘이 내려준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본다.누구나 120년은 살 수 있지만 죄를 지으면 그 수명이 단축된다. 상제가 어떻게 일일이 사람의 죄를 다 알겠는가..
그래서 옥황상제는 사람마다 삼시충을 심어놓고 60일에 한번씩 보고를 받았단다.
상제는 죄질에 따라 최하3일, 최고300일까지 그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도교 신앙에서 비롯된 경신수야는 원래 송나라에서 행해지던 풍속이었는데 고려가 받아들여 왕부터 백성까지 전 국민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에 나오는 경신수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265년의 일이다.원종6년 궁중에서 열린 경신연회에 대한 기록인데,연회의 주최자는 태자 심(諶)이었다.

심이 누구냐,\'노는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충렬왕이다.그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이름에 충자를 붙인 최초의 임금으로,몽고에 의존하여 왕위를 지킨 인물이다.
역사에는 그가 놀기를 워낙 좋아했으며,왕이 된 후에는 사냥을 하도 즐겨 국고가 바닥날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신일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성종17년11월19일 경신일,이날 성종은 경신일연회중에 호판노사신과 예성군어유소가 만취하자 대사헌 이경동과 사헌부 언관들이 성종에게 경신연회를 도교적 미신이라는등의 7가지 이유를 들어 파할것을 청하는 기록이다.
결국 거듭된 사헌부의 딴지로 성종은\'아~비가 오려나..니들 말들어 파하는게 아니고 비가올거같으니 이만 파하자..\'는 식으로 잔치를 마친다.

실록에 따르면 2년 후 또다시 언관들이 경신일의 밤샘을 폐지하도록 청했지만 성종은 전통이라는 이유로 좋지 않은 점만 고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신일의 밤샘연회가 없어진것은 성종이후 200년이 지난 1759년 영조때의 일이다.
영조는 밤샘연회를 금지시키는 대신 등불을 밝히고 근신하면서 밤을 새우도록 명했다.
결국 경신일에 밤을 새우는 전통은 18세기 중엽까지 계속된것을 알수있다.

전통이란 정말 끈질기기도하다.도교적 전통에서 시작한 경신수야만 해도 고려를 거쳐 조선 영조 때까지 600년 가까이 이어졌다.시작은 종교적 이유였지만 나중에는 온 백성이 즐기는 풍속이 되었다.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그러나 전통은 또 한순간에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기도한다. 600년이상이나 계속된 경신수야의 전통이 사라진 지 겨우 2백여년이 지났지만 이젠 아무도 그 전통을 기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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